영화의 설명을 위해서는 좀비의 성격에 대해 조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조 단테의 [병사들의 귀환]은 좀비물의 전통 하에서, 작금의 현실을 적용시켜 재해석을 단행한 영화니까.
좀비란 태초부터 빼앗긴 자를 상징했다. 웨스 크레이븐의 [악령의 관]에는 좀비를 만드는 법이 잘 설명되어 있는데, 좀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저주를 내리고자 하는 자에게 강한 약을 투여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지고, 죽은 것으로 판단되어 땅 속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완전히 죽은게 아니어서 일정 시간이 경과되고나면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다시 살아난 그는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다. 결정적 차이점은 그에게 자유의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좀비들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정치적인 지배/착취 관계와 경제적인 지배/착취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좀비=인육의 등식이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좀비는 삶을 갈구하는 자의 상징성을 갖추게 된다. 로메로의 좀비들은 소화기관이 없어 인육을 먹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따라 인육을 취한다. 그런데 그 본능이란 무엇인가? 살고자 하는 본능이다. 그래서 그들은 빼앗긴 자에서부터, 그것을 되찾기를 갈구하는 자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이의 인육을 취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 빼앗길 자가 빼앗는 자가 아닌 빼앗긴 자를 제거하는 이상한, 그러나 너무나도 현실적인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영화 상에서 좀비들이 살아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치적인 토론 중 공화당의 핵심인물이 이렇게 말한다. (이라크 파병으로) 죽은 자들이 돌아와서 조국을 위한 나의 죽음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얘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대로 죽은 이들은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이라는 명분에 의해 목숨을 빼앗긴 자였다. 그들이 한시적으로 산 자들의 세상에 돌아온 이유는 자신을 죽인 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진실을 빼앗겼으며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두가 상상할 수 있듯, 그들은 공화당의 소망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면 그들이 진실을 되찾아주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투표다. 산 자도 투표를 우습게 여기는 이가 적지 않은 마당에, 죽은 자는 고통을 느낌에도 불구하고(영화의 좀비들은 자신이 죽을 때의 고통을 간직하고 있다) 투표를 하러 돌아왔던 것이다. 민주시민이 정치인을 응징하는 유일한 방법은 투표임을 생각해볼 때, 이는 정말 멋진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좀비들은 투표를 하고나면 안식을 얻고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죽은 이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그 투표권을 함부로 포기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행사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 혹은 그릇된 만용 아닐까! 즉, 네 투표권을 헛되이 버리지 말라. 그것이 영화의 가장 큰 교훈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은 인육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소탕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인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까지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죽은 자들이 알려준 진실은 선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죽은 자의 귀환은 공포가 아니라 축복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공작이나 미디어 공작, 파병에 대한 진실, 부쉬 당선 시 일었던 부정선거 논란 등이 영화에 첨가되며 [병사들의 귀환]은 짧은 시간 안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그에 대해 영화는 노골적 비판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감독의 견해는 분명 치우친 해석이지만, 자유국가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건(분명히 선동적인 영화이기는 하다) 당연한 것(때로 축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만)이다. 그에 동의하느냐 않느냐는 별개의 얘기이고.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주인공 캐릭터도 상당히 재미있다. 그는 정치적 방향이 틀렸을 뿐 늘 진심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의 언동 하나하나는 전략적으로 변모하고, 그 주위의 누구도 그의 진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전문가이지만, 어느 정도의 회의와 가책을 가지고 있는 보통사람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은 '지식인의 거듭남'과 '정체모를 죄책감으로부터 구원'이라는 희망적 측면을 부각한다. 뭐, 앞서 말했듯 죽은 자의 귀환만큼 장대한 희망은 없다만. 게다가 기막히게 재미있기도 하다. 그러니 TV물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두 말 할 것 없는 걸작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2009. 7. Argento.
덧. 웨스 크레이븐은 영화의 상업성을 너무나 잘 이해한고로 오히려 저평가받는 감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은 웨스는 무척 지적이며, 과격한 사람이다. 말초적 재미를 추구하려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숨기지도 않는 편이다. 그 예로 두 작품만 거론해보자. [공포의 계단]은 "모든 세입자여, 단결하라."는 웨스크레이븐의 자본론이며, [악령의 관]은 독재정권의 타도에 대한 다소 앞서나간 좀비물이다. 물론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두 작품 모두에서 그의 정치적 관점은 정당하기도 하고, 그의 점잖지 못한 설교(박찬욱에 따르면)는 고리타분하지도 않다. 그런데 조 단테 작품에 웬 웨스 크레이븐에 대한 이야기? 조 단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조금 길게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