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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rcoaster Films/Dimension Extreme etc.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간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미화시키는 습성이 있는게 사실이다. 이미 이겨낸 고난이기에(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 시절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것처럼 착각하고는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삶 역시 잔인하고 폭력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국민학교만 들어가도 선생님들의 아름다운 설교들과 세상이 불일치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차리게 된다. 때로는 잃을게 너무 많아 몸을 사리거나,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잘 알고 있을 어른들보다 더 위험(가해자로서나, 혹은 피해자로서)에 빠지기 쉬운게 청소년들인지도 모른다. (학원물들이 더욱 폭력적인건 이런 이유이다. 박기형의 [폭력써클]을 보라. 축구하려고 모인 애들이 결과적으로는 싸움만 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불러일으킨다.)

올챙이 시절을 망각한 어른들은 아이들이라면 무릇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어른도 물론 적지 않겠지만, 실은 그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이 주는 공포가 그런 축에 속한다. [이든 레이크]는 하이킹을 갔던 곳에서 만난 불량 소년들과의 사소한 분란들에 의해 고통을 받는 젊은 커플을 그려내고 있는 영화다. 그런데 만약 가해자가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정서적 가학성은 상당부분 완화되었을 것이다. 관객은 어른과 똑같은 아이들을 보며, 아니 어떻게 애들이 저럴 수가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명심하라. 아이들 역시 어른이 하는건 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른을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다소 예측하기 쉬웠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러한 생각은 좀 더 구체화된다. 자신이 키우던 개가 아니라 자식이 죽었다는 좀 더 납득할만한 이유가 부모들에게 주어지기는 하지만, 사태에 대한 대응방식이란 아이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일삼는 아이들이란 영화의 초반부에서 스쳐지나갔듯, 자식의 뺨을 후려치던 아이의 어머니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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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rcoaster Films/Dimension Extreme etc.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초반부 그냥 스쳐가는 배경처럼 들렸던 교육에 대한 라디오 방송은, 러닝타임을 지나면서 점점 힘을 더한다. 아이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것 아니겠는가. 결과만 놓고보면 지독스러운 불량소년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심적 갈등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여겼던 영역에서 아이들은 폭력에 노출된다. 또한 그들은 폭력에 가담할 것을 강요받는다. 만약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을 향한 폭력일 뿐이다. 당신이라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선뜻 장담할 수 있는가?

자, 영화의 결론이자 교훈. 아이에 대한 책임은 어른이 져야 하는 것이다. 그저 애들 장난이라고 무시하는 동안 그 애들은 심각하게 병들어버릴 수도 있고, 또한 일단 한 번 발병하고나면 그 병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든 레이크]는 불쾌하지만, 깔끔하고, 똑똑한 영화다.

2009. 7. Argento.


. 아이를 전면에 내세우는 공포영화(혹은 사회고발성 블랙코미디)란 대체로 끔찍하고 불쾌하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은 불량소년 무서워요가 아닌, 다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록 보는 동안은 엄청나게 불쾌하겠지만, 그래서 눈을 돌리고 싶겠지만 원래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법. 생각해보라.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어른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똑같은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 대입시키면 뭔가를 깨닫기가 훨씬 쉽지 않겠는가? 은유만큼 힘이 센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