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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07 1Q84, 하루키 문학의 총집편 (10)

하루키의 소설에는 뭔가 잘 잡히지 않는다느니, 엔터테인먼트적 속성이 강하다느니, 혹은 쓸데없이 선정적이라거니 등등(그래서 결국은 별거 아니라는 식)의 비난이 종종 따르는 듯 하다. 이런 비난들은 모두 얼마간 옳다. 그의 소설들은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다가는 명확치 않은 이상한 세계로 넘어가 삼천포로 빠지는 듯 하기도 하고, 풍속화된 순수문학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정적 묘사들 역시 넘쳐난다. (나는 펠라치오라는 용어를 그의 소설을 통해 처음 배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속성들이야말로 지금까지 하루키가 줄창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책임하게 생각을 던져 놓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은 어딘가 공정하지 않은 느낌이라, 지금부터 그러한 생각에 대해 설명을 덧붙여볼 생각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두서없고 마구마구 치우친, 긴 글이 될 것 같으니 읽는 이의 정리를 당부한다.

<이 포스팅은 [1Q84]와 [1984], [상실의 시대]의 내용을 알고 보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1. 일본의 60~80년대

49년생인 하루키는 각종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던 60년대 후반에 10대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그 시절을 모든 주위의 사물들이 강력하게 요동을 치던 이른바 '배멀미의 시대'로 명명하며, 당장이라도 무엇인가가 굳은 껍데기를 깨고 막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그 변동을 자기 손에 움켜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그러한 실감 속에서 살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이상 혹은 이상과 유사한 무엇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과, 그들이 부르짖던 구호들은 70년대를 거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러한 배경이 결국 상실의 시대의 근간에 놓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남은 것은 80년대, 온전한 소비사회로의 이행이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최우선인 시대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개인의 행복 추구를 지상 최대의 목표로 생각하는 것은 여자 뿐만은 아니다.

극히 평범한 여자는 무엇이 공정하냐 아니냐보다는, 무엇이 아름답다든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것을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해요. '공정'이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사용하는 말이에요. - [상실의 시대] 중에서

추후 좀 더 설명하겠지만 하루키의 소설이 90년대 들어 한국에서 크게 유행한 것도 이러한 시대의 공기를 제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게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70년대는 한국의 80년대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 역시 비슷했다. 데모가 넘쳐났던 이데올로기사회는 문민정부를 기점으로 하여 소비사회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대학의 총학생회들의 역량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등록금 투쟁에 집중되는 듯 보였고, 이상의 구현에서 학생복지의 확대라는 화두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그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2. 소비시대와 유희적 인간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하루키는 계속해서 [상실의 시대]를 그려내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체로 능력은 있으나 최고가 되겠다는 욕망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할 맘만 있으면 제법 성과를 올릴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목표가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목표가 없기에 생업 현장에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되, 대신 노력의 부재로 인해 남아나는 시간(남아나는 시간이란게 꼭 나쁜 뜻은 아니다. 나는 개인이 죽어라 노력하기를 요구하는 편은 아니다)을 문화적 허영 혹은 문화적 유희로 채웠다. 그의 소설에서 인용되는 책, 음악, 영화들은 어딘가 속된 말로 겉멋이 들어있지만(허영), 그들은 그 문화상품들을 제대로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유희). 선정적인 묘사들 역시 목표를 추구하는 삶이 아닌, 유희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주인공들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섹스야말로 가장 근본적이자, 인간 궁극의 유희인지도 모르니까. (그의 소설에서 묘사된 성적인 관계들은 엄청난 애정의 결과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이 역시 나쁜 뜻은 아니다. 나는 다른 이의 성적인 취향이나 태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소비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란 유희이다. 주체는 개인이고. 따라서 소비사회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유희들이 얼마나 충족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특히 문화상품에 있어)은, 상품의 질만큼이나 사용자의 해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즉, 수용자를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결국 포스트 모더니즘과 맞닿아 있다. 사실 문화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항상 함께 했던 시절도 그리 오래된 과거의 것은 아니다.


3. 수용자 해석과 포스트 모더니즘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주제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본질이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없다. 능력도 없고. (제가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말 그대로 모더니즘의 다음이라는 뜻)로부터 시작되었고, 도그마로서 기능하는 어떤 생각들이나 사상에 대항한 다원주의가 중요한 속성을 이룬다는 사실 정도는 명확하다. 즉, 절대적인 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더 이상 단선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악인이 있었고 선인이 있었습니다. 가치관은 반전되고 또 반전되었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똑같이 소리 높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진실의 언어가 있었고, 허위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깨끗함이 더러움이 되었고, 더러움이 깨끗함이 되었습니다. (중략)
지금 이 시대에 서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매우 이상한 기분에 잠기게 됩니다. 그 격렬한 시대를 탄생케 한 변동의 에너지는,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가져오게 한 것인가 하고. 그 당시에 매우 대단한 큰일로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하고. - [상실의 시대] 저자서문 중에서

특히 문학에서 도드라진 것은 환상성의 개입이었다. 절대적인 현실의 객관화된 모습은, 개인의 환상과 결합되어 상대적인 세계로 탈바꿈한다. 그러한 점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전형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의 소설들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어느 순간 지워지고(없어진 고양이를 찾으려다가 이상한 모험을 하게 되는 [태엽감는새] 연작처럼), 실존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우물을 집요하게 찾다가, 역시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는 양사나이와 조우한다. 이러한 우물과 양사나이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능하지만, 그 실체를 명확하게 단정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징이라는 것이 반드시 어떤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는 모더니즘적 해석보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해석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 당시의 거장을 폄하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거장이 내게는 거장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입각한 하루키의 태도는 결국 그 자신에게도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변질된 순수문학(거장의 포스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릴만한 기운을 풍기지 않는다)이라는 거대한 유행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도그마에 대한 반발로서의 성격이 강했기에,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학문이라기보다는 문화운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실체없는 양비론과 같은지도 모른다(니 입장에서 보면 니 말도 맞고, 내 입장에서 보면 내 말도 맞아). 그래서일까, 하루키는 [1Q84]에서 드디어 자신의 생각들을 좀 더 노골적으로 구체화할 생각이 들었나보다. 이제 [1Q84]로 들어가보자.


4. 해체된 이데올로기, 사라진 빅브라더

앞서 설명했듯 하루키의 상실이란, 구호의 사라짐이자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것은 [1984]에서의 빅브라더의 퇴장을 의미한다. 커다란 포스터 속에서 모두를 향해 감시의 시선을 보내며, 개인을 말살하는 폭압적 절대자인 빅브라더는 원래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화적 상징이었지만, 시대를 지나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폭압적 이데올로기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공산주의가 사라졌어도, 빅브라더는 얼마간 살아남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진전은 투표권을 통해(비록 투표라는 행위는 애로우의 불가능성정리에서 증명했듯 합리적 집단선택으로 이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개인의 뜻이 사회에 반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각, 더불어 인권에 대한 개념의 확산으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을 감시하고, 미디어를 조작하며, 개인을 말살하던 초절대자는 새로운 세상에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결과, 빅브라더는 사라졌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빅 브러더라는 독재자를 등장시켰어. 물론 스탈린주의를 우화적으로 그린 것이지. 그리고 빅 브러더라는 용어는 그 이후 일종의 사회적 아이콘이 되었네. 바로 지금, 실제 1984년에 빅 브러더는 너무도 유명하고 너무도 빤히 보이는 존재가 되었어. 지금 우리 사회에 빅 브러더가 출현한다면 우리는 그 인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겠지. ‘조심해라. 저자는 빅 브러더다!’라고. 다시 말해 실제 이 세계에는 더 이상 빅 브러더가 나설 자리는 없네. 그 대신 이 리틀 피플이라는 것이 등장했어. - [1Q84] 중에서

물론 [1984]의 개념이 낡아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이나, 인간의 조건이나, 사랑에 대한 성찰은 아직도 탄성을 자아낸다. [1984]는 여전히 내 인생 10권의 책을 꼽는다 해도 그 중 최상단에 놓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성급하게 단언하자면, 오늘날, 빅브라더는 사라졌다. 물론 그것을 지금 재현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꼰대도 있고, 그것의 잔재가 아직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에 우선하던 시대와 비교하자면 엷디 엷은 마지막 숨을, 가까스로 토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빅브라더 퇴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추후 좀 더 설명하겠지만 문제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할 구체적 대상을 잃었다는 것이다.


5. 대중의 무의식, 리틀피플의 시대로

[1984]에서 윈스턴은 빅브라더에 대한 불굴의 저항의식을 가지게 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인간이란 약물을 이겨낼 수 있으리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씩 고문에 패배한 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인간에게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너무 과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공정한지도 모른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은 그 시절보다 훨씬 교묘하다. 오늘날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저항의 기회조차 잃어가고 있다. 싸울 대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라진 대상을 하루키는 리틀피플이라 명명하고 있다. 물론 하루키가 [1984]와 맞짱을 뜸으로서, 자신도 그 정도의 작품을 하나 낼 때가 되지 않았나(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노벨상을 노려볼까라는 욕심도 숨겨서)라는 생각으로 [1Q84]라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든다. 분명히 하루키는 빅브라더에 대한 대항마로 리틀피플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사실 둘은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빅브라더는 강건한 이데올로기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실존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몇 살인지에 대해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리틀피플 역시 항상 존재했으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었고(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모양을 바꿀 수 있다), 각종 이름으로 불리고는 했다는 점에서 그 실체가 명확한 존재는 아니다. 즉, 둘은 모두 실체는 없지만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회집단에서 종교집단으로 변질되면서 리틀피플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다는 점은 두 개념 사이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음을 넌지시 내비친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리틀피플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실 리틀피플의 정체는 이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게다. 나로서는 짐작이 고작이다. 내가 짐작하는 바를 늘어놓아보면, 오늘날 리틀피플이란 대중 혹은 대중의 무의식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리틀피플은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어떤 방향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중과 유사하다.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점 역시 그러하다. 또한 선구라는 사회조직(대중이 모여 만들어진 집합체)에서 리틀피플이 활개치기 시작했다는 점은 대중과 리틀피플의 관계를 명확히 인지하게 한다. 그러나 잠든 매개체를 통해 리틀피플이 다른세계로 건너온다는 설정으로부터 판단하건대, 리틀피플은 대중 그 자체보다는 대중의 무의식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6. 두 개의 세계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나 적어도 겉보기에는 어떤 권력도 아닌, 개인들이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즉, 이념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에 비해 분명 개인들은 좀 더 좋은 조건에 있다. 하지만, 빅브라더가 없어졌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주위의 대다수는 고통받고 있으며, 노력의 정당한 대가는 수취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구현하기에는 턱없이 여유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살펴봐도, 군부가 끝나면 세상이 엄청나게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1984]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세상이 변해봐야 지배층만 바뀔뿐, 하층민은 여전히 하층민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빅브라더 시절의 온갖 부조리들은 대체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리틀피플이란 순응한 윈스턴들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크게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방향은 반대다. 실은 빅브라더를 만들어낸 것 역시 인간의 무의식이었을 것이다. 즉, 빅브라더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계속 바뀌어온 리틀피플의 이름들 중 이데올로기 시대에 잠깐 불렸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빅브라더의 망령이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그것이 맹위를 떨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빅브라더에 대한 저항처럼 쉬운 해답으로 해결될만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문제를 유발하는 것들은 대중 속에 분산되어 숨어버렸다. 대중이 뭐가 문제냐고? 예를 들어 민주주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국민들이 어떤 사안에 반대의사를 표명해도, 집권당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그들은 이미 선거를 통해 당선된 바 있고, 그래서 침묵하는 다수는 자신의 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대개 확신범이다. 그런데 누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대중이다. 그래서 집합체로서의 대중이란, 현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악덕대기업(진짜 악덕이라는 뜻은 아니다)이 살아남는 이유는 뭔가? 대중이 물건을 사주기 때문이다. 각종 문제의 근원 혹은 책임들이 대중 속으로 분산되어 도피하면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핵심 혹은 해결방안에 다가가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리틀 피플들은 단선적인 사고로 도달하기 어려운 미로를 파고 숨은 채, 인간이 잠든 틈을 타서 마구 돌아다닌다. 즉, 세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인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1Q84]에는 두 개(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서로 다른 병행 세계가 나온다. 그 세계들은 겉보기에는 그다지 다르지 않아, 세심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이러한 두 세계의 병행과 교차는 하루키 소설에서 꽤 흔한 전개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대칭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다. 이러한 두 개의 세계를 설정한 이유란, 참모습을 알 수 없는(혹은 알기 어려운) 세상의 속성 때문이다. 즉, 우리는 진짜 세계를 보지 못하고, 그와 유사한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혹은 우리가 진짜 이상을 보지 못하고, 그와 유사한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이 두 개 떠 있는 세상에서, 혹자는 달이 두 개 떠 있는지도 모른채, 어떤 혹자는 원래부터 달은 두 개였나를 의심한 채 살아간다. 사실 달이 두 개 떠 있다는 사실은, 달을 보지 않는 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달이 두 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나면 세상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두 개의 달을 인식하는 순간, 그들은 다른 세상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즉, 두 개의 달을 보는 것은 현실의 실체에 대한 각성이요, 리틀피플을 인식하는 것은 집단 무의식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리틀피플을 나쁜 것으로만 매도했지만, 비관만 할 필요는 없다. 리틀 피플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며, 뚜렷한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기에, 전혀 희망이 없는건 아니니까.


7.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사실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하루키 소설(특히 [상실의 시대]와 [1Q84])의 본질은 결국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실의 시대] 저자서문을 오래간만에 다시 읽으면서, 나는 하루키가 얼마나 일관된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사실 [1Q84]의 서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하다.

읽어 보면 알 수 있게 되겠지만, 내가 여기서 그려 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그 싸움에서 살아 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 [상실의 시대] 저자 서문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도. - [1Q84] 중에서

대중에 대한 희망이란 구체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둘러싼 현실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니까. 어떤 문제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개의 문제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자가 노동자를 적대하고, 진보주의자가 진보주의자를 적대하는 이상한 광경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것이 진짜 이상한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간다. 그런데 만약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 있다면? 아마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 웃음이 나오는가?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정치적인 소설이면서, 사회적인 소설이기도 하지만(상실의 시대 저자서문에서 하루키가 자신의 소설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소설임에 대해 다소 점잖은 투로 부정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강하게 로맨스의 성격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8. 마치며 - 1Q84, 3편에 대한 기대

3권이 나오고나면 완전히 뻘소리가 될 수 있을만큼, 사견이 너무 많이 들어갔고 길어지기까지 했다. 솔직히 시작할 엄두를 못했던만큼,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지도 고민스러웠다. 어쨌거나 후카에리의 공기번데기라는 글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 즉 리틀피플에 대해 접근할 수 있음은, 결국 그간 내보이기를 자제했던 작가로서 하루키의 자의식이다.

내 생각에 하루키는 [1Q84]를 통해 상실의 시대의 종식, 다른 말로 리틀피플의 직시를 천명했다. 그간 목표를 상실한 듯 보였던 주인공들 대신, 뚜렷한 목표의식을 지닌(혹은 찾아내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등장시킴으로써 새로운 목표를 제시해보자는 주장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빅브라더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대중을 이끌어 좋은 결과를 도출해보자는, 변화된 시대의 공기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간 모호한 상징으로 처리했던 개념들을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모호한 부분은 있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아직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3권을 낸다면, 그 핵심은 리틀피플의 실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거나 이토록 날카로운 이야기를 그처럼 편안하게 풀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키는 위대한 작가다. 만약 누군가가 '위대한'이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한들, 적어도 시대의 작가라는 말 정도에는 동의할 수 있을게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 E. Y. Harburg & Harold Arlen, It's Only a Paper Moon, [1Q84]에서 재인용




2010. 1. Arge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