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불리는 일본소설들을 많이 읽다보니 든 생각인데, 미스테리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유용한 하나의 틀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자면 그것을 듣는 (혹은 보는) 사람의 호기심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 [넘버23]도 역시 미스테리라는 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본질은 미스테리가 아닌 드라마이다. 자신의 의식 심층에 숨어 있는 악몽이 되살아났을 때, 그것을 다시 대면하는 남자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과대망상일까에 대한 미스테리로 풀어가던 영화는 중반부 이후 방향을 선회한다. 범인이 밝혀졌으면 왜 그랬을까를 묻는 것이 인지상정일테니, 당연한 수순일테지만. 이제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된 불행을 떨쳐내지 못하는 남자(일종의 운명론적 시선)에게, 변할 수 있다(삶은 선택에 불과하다라는 운명을 거부하는 시선)는 구원을 선물하겠다라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가 남아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고 싶지만, 그가 저지른 과거의 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할까?
영화의 결정적 패인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감독은 나이브하고도 모범적인, 그래서 거부감까지 만들어내는 한 마디로 재미없는 결론을 내린다. 흥미있던 이야기와, 괜찮았던 배우들의 열연이 흐려지는 지점. 너무나 아쉬움이 남는 엔딩이다.
2007. 4. Arborday
덧 1. 드라마에 비해 미스테리는 대단치 못한 느낌이에요. 너무 많은 우연적 요소야 그렇다 치더라도, 장르를 모호하게 만드는 그 개는 도대체 어떤 센스에서 나온건지.
덧 2. 숫자23에 집착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장면은 제가 영화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 부분입니다. 숫자 23에 대한 집착은 음모론으로 봐주기에는 너무나 유치한게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끼워맞추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을테니까요. 썩 만족스러운 답을 영화는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덧 3. 짐캐리의 연기변신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만, 사실 짐캐리야 어느 영화에서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 - 저는 가끔씩 샤이닝에서 잭니콜슨이 맡은 역을 짐캐리가 대신하는 그림을 머리속에 그려보기도 합니다 - 라 그런지 덤덤했습니다. 저를 놀라게 했던 건 오히려 버지니아 매드슨이었죠.
덧 4. 아차.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운 평에 가깝다 생각하지만, 그건 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에요. 악평들이 인터넷을 덮고 있는 것 같아 포스팅을 쓰기 시작했으면서도 저 역시 서운함이 컸는지 이렇게밖에 안 써지네요. 그래서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영화 재미있었습니다. 마음이 동하신다면 직접 보시고 평가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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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熱くなれ 2007/04/01 17:54 # 답글
저도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그다지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르지요. 마지막에 기운이 쫙 빠지긴해도. ^^
히치하이커 2007/04/01 18:32 # 답글
23하면 역시 MJ...이건 스파이더맨인가 -_-?아, 그러니까 마이클 조던이죠. 흐흐흐
ArborDay님 말처럼, 저는 이제 짐 캐리가 이런 영화 찍는다고 연기 변신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터널 선샤인도 있고, 트루먼 쇼(약간 코믹한 감은 있지만) 같은 영화도 있고, 안 웃긴 영화도 이미 많이 찍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연기도 좋았구요. 다만 웃긴 영화들이 너무 떴을뿐.
ArborDay 2007/04/01 20:07 # 답글
熱くなれ님/ 엔딩은 좀 그랬어요. 흑흑.히치하이커님/ 우리 세대야 23은 역시 조단. 사실 짐캐리는 연기변신이라고 하기엔 워낙 연기를 잘 하는 배우에요. [맨온더문]에서도 죽였고, [케이블가이]에서의 사악한 눈빛도 좋고.
돼지콜레라 2007/04/01 20:39 # 답글
짐 캐리, 사실 '케이블 가이' 때부터 이미 변신은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연기변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걸 보면 '에이스 벤츄라'나 '덤앤 더머'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긴 각인되었나 봅니다..^^;
Tomek 2007/04/01 20:43 # 삭제 답글
아~ 샤이닝의 잭 니콜슨을 생각하고 계셨군요~ 저는 싸이코의 앤서니 퍼킨스의 역할을 짐 캐리가 맡으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요. ^.^; 짐 캐리가 깨진 문틈사이로 "Here's Jonny~"라고 이죽거리는 모습이 꽤 그럴듯 할 것 같네요~저는 <23>이 <크라우디드 룸>인줄 알고 봤다가 낙심한 경우입니다... 24명의 자아를 가진 주인공을 짐 캐리가 연기한다면 정말 굉장할 텐데요~ 물론 조니 뎁도 훌륭하겠죠~
하얀혜성 2007/04/01 20:59 # 답글
트랙백 걸어주신거 보고 찾아왔습니다. 저 역시 짐캐리의 연기는 좋았지만 영화자체는 참 "기대"한것보다 영 썰렁하더군요.. 영화에 대한 많은 포스팅을 보고 놀랐습니다. 링크 걸고 종종 찾아와 읽어보겠습니다^^
북극찐빵 2007/04/01 21:56 # 답글
저도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감상을 끄적인 사람 중 하나이고, 솔직히 기대치에 비하면 실망스러웠는데요, 생각보다 일찍 해결되는 사건이며 바라지도 않던 친절한 해설이며 운명과 죄와 구원 등등을 엮은 도덕적인(?) 마무리...같은 것이 불편했나봅니다.저도 이제 기억나는 건 버지니아 매드슨 뿐이네요. 상반된 매력의 두 가지 모습이 다 강렬하고 멋지고 부럽더군요;;
ArborDay 2007/04/01 22:20 # 답글
돼지콜레라님/ 그러게 말이에요. 하긴 꼭 이 영화가 아니라고 해도 연기변신이라는 마케팅문구를 보고서, 동의하지 못한 적이 꽤 많았어요. [오로라공주]의 엄정화나, [타짜]의 김혜수나 원래 다들 그런 모습들을 갖추고 있었거든요.Tomek님/ 며칠 전에 케이블에서 [샤이닝]이 보이는데, 말씀하신 그 장면에서 딱 짐캐리를 연상했었어요. 어울릴 것 같더라구요.
그러고보니 [싸이코]에서의 앤서니 퍼킨스의 역할 역시 꽤 잘 어울릴 듯 하네요. 헤헤.
하얀혜성님/ 앞으로 자주 뵙기로 하겠습니다. 또 뵈요. (웃음)
북극찐빵님/ 버지니아 매드슨, 모르고 봤으면 1인 2역을 못 알아봤을지도 몰라요. 어쩜 그렇게 다른 두 여자의 모습이 나오는지.
mavis 2007/04/01 22:44 # 답글
밸리에서 '넘버 3'로 읽고 들어왔어요 -_-;; 사진을 보니 짐캐리도 꽤 늙었고, 버지니아 매드슨은 오랫만이네요.
겜퍼군 2007/04/01 23:17 # 답글
지난주말에 보고 포스팅을 생각했지만 영화 개봉한지 이틀만에 그짓하면넘한거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arborday님께서 대신 해주셨군요..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역시나 이런장르가 전문이시라 식견이 다르시군요
나무피리 2007/04/01 23:25 # 답글
저는 보고 직접 판단해보고 싶어요^^ 조만간 시간내서 보고 감상글 올려야겠어요^^이터널 선샤인의 짐캐리를 보고, 새로운 면면을 느꼈거든요. 이런 느낌의 영화에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구요.
기대하셨던 것보다는 서운하셨단 글이었지만, 그래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ArborDay 2007/04/01 23:43 # 답글
mavis님/ 버지니아 매드슨이 나온 작품 중 제가 최근에 본게 [사이드웨이]였으려나. (웃음)겜퍼군님/ 전 (시사회로) 이 영화 본지 꽤 오래 지났답니다. 개봉한지 이틀밖에 안 지났군요. ^^;;
잘 읽으셨다니 다행스럽네요. 겜퍼군님의 포스팅도 기다릴께요.
나무피리님/ 사실 글쓰기가 무진장 어려웠습니다. 굉장히 짧게 썼지만 글로 정리가 잘 안되어서 말이죠. 애정과 서운함을 동시에 표현하기란, 제 수준에서는 불가능이에요.
재미있다는 말이 사실 꽤 중요한 부분인데.
delius 2007/04/02 00:38 # 답글
마지막 부분 보면서 버지니아 매드슨은 맥베스 부인 역 해도 잘할것 같다는 생각을...(퍽)
ArborDay 2007/04/02 18:39 # 답글
delius님/ 버지니아 매드슨은 어떤 역할도 다 잘 해 낼 것 같았어요. (웃음)
니와 2007/04/02 19:14 # 답글
내용공개에 걸려서 아직 읽지 못하는군요 ㅠㅠ 얼른 보고 와야겠습니다!
ArborDay 2007/04/02 21:10 # 답글
니와님/ 얼른 보고 오세요. 아쉬웠지만, 나쁘지는 않았거든요. (웃음)
하늘바라기 2007/04/06 14:09 # 답글
트랙백을 걸어주셨는데 이제야 와서보고 답글을 답니다. 헤헤*^^*와서 감상평을 보고 갑자기 짐캐리 영화를 다시 한번 챙겨보고 싶어졌네요.
사실 머리에 남는 영화들은 대다수 코미디영화밖에 기억이 안나서..
이터널 션사인이나 케이블가이를 주말에 함 다시 봐야겠네요..
여튼 잘 보고갑니다. *^^*
미르누리 2007/04/10 16:13 # 답글
보고싶지만 이번달 카드 명세서흫 보고는 gg 를....ㅠ.ㅠ
ArborDay 2007/04/10 23:58 # 답글
하늘바라기님/ 꼭 보세요. 정말 좋은 영화들이랍니다.미르누리님/ 하하하. 카드명세서를 보면 저도 gg 쳤을걸요.
seimei 2007/04/12 23:11 # 삭제 답글
그래요, 저도 포스팅했지만 짐 캐리외에는 별 볼게 없었습니다, 해도 과언은 아닐듯(전 아들역의 배우도좋았지만요;;;)저도 미스테리가 아닌 드라마쪽은 나쁘지 않았다고생각해요.
ArborDay 2007/04/13 11:33 # 답글
seimei님/ 그래서인지 전 영화, 아주 나쁘지는 않았어요. 물론 더 잘 만들 수 있었던 영화니 아쉬운건 사실이지만.
천용희 2007/04/20 20:34 # 삭제 답글
워낙에 조엘 슈마허라는 감독이 편차가 좀 심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거 같습니다. 그래도 이 양반 최소한 자리 박차고 나오는 영화는 안 만들어주니 다행일 지도 모르죠. 요즘은 전설의 우화백과, 그 친구들이라 할만한 양반들도 꽤나 설쳐대는 상황이니까요.P.S. 크라우디드 룸은 아직도 공중에 뜬 상태로 훨훨 날아다니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감독이 조엘 슈마허로 확정상태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죠......
ArborDay 2007/04/20 23:28 # 답글
천용희님/ 우화백은 영화만 이상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행동까지 기이해서 감당이 안되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뭐, 보고 있자면 아주 재미있기는 한데.
우화백이라고 그러니 우인태씨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런 실례를 하다니. ^^;;